조선시대 말기(朝鮮時代 末期)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政治的으로 매우 混亂스러운 時期)였다. 이 시기(時期)에는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지속(持續)되면서 왕권(王權)이 약화(弱化)되고, 백성(百姓)들의 생활(生活)은 어려워졌다. 이러한 상황(狀況)에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고종(高宗)은 조선(朝鮮)의 정치(政治)를 이끌며, 서로 다른 역할(役割)을 수행(遂行)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고종(高宗)의 아버지(父)로, 어린 고종(高宗)을 대신(代身)하여 정치(政治)를 주도(主導)하였다. 그는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타파(打破)하고 왕권(王權)을 강화(强化) 하기 위해 여러 개혁 정책(改革 政策)을 추진(推進)했다. 대표적(代表的)인 개혁 정책(改革 政策)으로는 서원 철폐(書院 撤廢), 호포제 실시(戶布制 實施), 경복궁 중건(景福宮 重建) 등(等)이 있다.
서원 철폐(書院 撤廢)는 지방(地方)의 유력자(有力者)들이 장악(掌握)하고 있던 서원(書院)을 폐지(廢止)하여 국가 재정(國家 財政)을 확보(確保)하고, 백성(百姓)들의 부담(負擔)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호포제(戶布制)는 양반(兩班)들에게도 군포(軍布)를 부과(賦課)하여 백성(百姓)들의 군포 부담(軍布 負擔)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경복궁 중건(景福宮 重建)은 왕실(王室)의 권위(權威)를 회복(回復) 하기 위해 경복궁(景福宮)을 다시 짓는 것이었다.
하지만 고종(高宗)은 성장(成長)하면서 자신(自身)의 정치(政治)를 하고자 하였고, 이에 따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갈등(葛藤)을 빚게 되었다. 고종(高宗)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개혁 정책(改革 政策)이 백성(百姓)들의 부담(負擔)을 가중(加重) 시키고, 왕권(王權)을 약화(弱化) 시키는 것이라고 생각(生覺)했다.
결국(結局) 고종(高宗)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권력(權力)에서 물러나게 하고, 자신(自身)이 직접 정치(直接 政治)를 주도(主導)하게 되었다. 고종(高宗)은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와 내각(內閣)을 설치(設置)하여 정치(政治)를 개혁(改革)하고,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宣布)하여 황제(皇帝)의 지위(地位)에 올랐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고종(高宗)의 관계(關係)는 조선시대 말기(朝鮮時代 末期)의 정치적 변화(政治的 變化)를 이해(理解)하는 데 중요(重要)한 역할(役割)을 한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개혁 정책(改革 政策)은 조선(朝鮮)의 발전(發展)에 기여(寄與)하였으나, 고종(高宗)의 친정(親政) 이후(以後)에는 외세(外勢)의 침략(侵略)에 대처(對處)하지 못해 조선(朝鮮)의 멸망(滅亡)을 초래(招來)하였다.